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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차
      • 유리왕의 탄생과 성장과정
      • 치희와 유리왕의 황조가
      • 유리왕이 치희를 떠난 이유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누구나에게 아픈 현실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추스리며 애도의 시간을 보냅니다. 사고로 급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다면 그 또한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오겠지요. 그러나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면,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속 인물인 고구려 유리왕 역시 정치 소용돌이에서 사랑하는 치희를 떠나 화희와 연을 맺게 됩니다. 힘든 시절 동행해준 치희에게 이별을 암시하고 치희는 이를 의연히 받아들이며 아름답게 무대를 퇴장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고구려 귀부인, 화희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고구려 귀부인, 화희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유리왕의 탄생과 성장 이야기

    먼저 유리왕의 탄생 이야기 속으로 가보겠습니다. 유리왕은 고구려의 제2대 왕으로, 주몽(동명성왕)과 예씨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주몽이 동부여에 잠시 머물 당시 예씨부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주몽이 졸본 지역으로 떠나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동부여에 남겨지게 됩니다. 유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주몽의 존재를 들으며 자라났고, 자신이 왕자의 혈통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리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대나무 속에서 나뭇잎으로 만든 이상한 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편지는 유리에게 주몽을 찾아가라는 상징적인 계시로 해석됩니다. 그후 유리는 어머니 예씨부인과 아버지를 만나러 떠나게 되고, 결국 아버지 주몽과 극적인 재회를 이루게 됩니다. 고구려에 도착한 유리는 아버지주몽의 인정을 받았고, 주몽은 유리를 후계자로 삼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졸본에서 주몽과 함께 나라를 세운 아내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있었기에, 왕위를 둘러싼 긴장도 존재했습니다. 이에 소서노는 아들들과 함께 남하하여 지금의 전남 지역에 백제를 세우게 되고, 유리는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로 자리잡게 됩니다. 유리왕은 이후 왕위에 올라 고구려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고구려 초창기의 계승과 갈등, 가족과 권력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서사로 평가됩니다. 이제 유리왕의 첫 부인 치희와 얽힌 이야기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치희와 유리왕의 황조가

    지금 이야기할 치희 유리왕의 이야기는 고구려 초기에 있었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치희는 유리왕이 방랑하던 시절에 만난 여인입니다. 추측컨데 치희는 유리가 왕이 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보살핌으로 함께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시절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치희는 유리왕을 따르며 정성껏 보필했고, 어려운 시절 그의 곁을 한결같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유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화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치희와 화희는 왕궁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처소를 두고 생활하였다고도 전해집니다. 고구려인이었던 화희는 중국 한족이었던 치희와 다투는 일이 잦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치희는 결국 왕궁에서 떠나고 맙니다. 7일간의 사냥에서 돌아온 유리왕은 치희를 찾으러 그녀의 친정으로 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황조가를 지어 부릅니다.

    • 황조가 : "펄펄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함게 돌아갈꼬"

    왕으로서의 책임과 정치적 선택은 갈수록 유리왕에게는 큰 부담이었고, 결국 치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유리왕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오이노래’를 지어 불렀고, 치희는 그 노래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버림받았음을 즉각 깨닫습니다. 슬픔에 잠긴 치희는 결국 조용히 유리왕 곁을 영원히 떠났고, 이후 그녀의 운명은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흔적은 오랫동안 전설로 남아 우리에게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별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유리왕과 치희의 이별 

    유리왕과 치희의 이별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 모릅니다. 유리왕이 평민이었을때 만난 치희와의 이별의 수순은 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먼진 유리왕과 치희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구조적 정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살뜰한 정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화희의 출현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세가지로 더 자세히 축약할 수 있습니다.

    1. 첫번째로, 치희는 왕권강화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리왕은 재위 시절 졸본에서 온조등과 왕위 다툼을 버렸으며 결국 남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송양왕과 정치적 관계로 엮여있던 치희와 헤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2. 두번째로, 유리왕은 졸본에서 남하하여 다시 국내성으로 천도후 화희를 만나게 됩니다. 졸본 왕권의 수호자 치희는 국내성으로 가버린 유리왕과 따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마음도 멀어져 당연히 배제되었겠지요. 삼국유사에 이 일을 두고 치희는 유리왕에게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떠나겠다"라고 전해집니다.  
    3. 세번째로, 앞서 언급했듯이 화희의 치희를 향한 언사 "치희 너는 한나라의 비천한 몸으로 어찌 그 무례함이 심한가"라는 말이 치희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습니다. 고구려인 화희가 쏟아낸 한나라인 치희를 향한 적대감의 표시가 말입니다. 한나라의 현도군 세력을 몰아내며 성장한 고구려인들의 정치세력 앞에서 치희는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틀은 사랑 이외에는 깨뜨릴 수 없는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평범한 부부 생활을 이어나가던 치희는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던 유리왕과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 놓여졌습니다. 이는 화희의 방해라고 하기보다는 유리왕이 처한 정치 상황과 권력이동으로 인한 왕권강화가 빚어낸 어쩔 수 없는 치희의 이별 선택이었습니다. 사랑이 떠나버린 결혼 생활은 아무 의미 없다는 단호한 결정으로 유리왕 곁을 떠난 치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선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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